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불교/타 종교 간의 관계 (문단 편집) == [[이슬람]] == [[파일:event_80743_original-1.jpg]] * 라시드 앗 딘 하마다니의 <집사>에 묘사된 석가모니 [[인도 반도]]에서 불교가 거의 사그라 든 것은[* 현재 [[인도]]의 불교 신자 수는 [[기독교]] 신자보다도 더 적다.] 바로 [[이슬람교]] 때문이다. 비단 인도뿐만 아니라 8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사그라 든 것도 이슬람교의 확산과 맞물린 일이다. 즉 8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인도의 이슬람교도 확산은 불교의 축소와 연관되어 있다. 다만 불교가 완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 중앙아시아 [[발흐]], [[사마르칸드]], [[부하라]] 등의 도시의 불교 대학들이 이슬람 건축이나 이슬람 대학 시스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슬람의 신학 학교들인 [[마드라사]]들은 중앙아시아 불교 사원, 특히 아프가니스탄 [[발흐]]의 나우바하라 불교 사원의 체계에서 기원한다. 그리고 몽골의 침략 이전 중앙아시아의 마드라사들은 이슬람 교리를 집대성하는 학문적 중추로 기능한다. 그리고 불교 교리는 이슬람 [[수피즘]], [[쉬아파]] 교리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서기 10~11세기 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활동하던 천문학자 겸 역사학자 [[알 비루니]]는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북인도를 여행한 후 인도의 철학과 종교, 역사와 언어, 문화 등을 다룬 <키탑 알 힌드>라는 책을 저술하는데 이 책에서 알 비루니는 힌두교 경전이나 철학서 이외에도 불교 관련한 기록도 상세히 남겼다. 물론 무슬림인 알 비루니 입장에서 불교 신도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웠고 대신 비루니는 석가모니 부처를 칭송하는 기록을 남겼다. 알 비루니는 인도의 석조 수조를 보면서 아직 무슬림들의 기술 수준은 아직 이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겼다가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 자문화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도 문명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상당한 노력과 성과를 보여준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몰디브에서는 1153년에 국왕인 이븐 압둘라 술탄이 자발적으로 불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이후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이슬람이 포교되면서 불교를 밀어내고 이슬람교가 주류종교가 되었다. 이 경우에는 왕권강화[* 이 시기는 몰디브가 통일된지 얼마 안되었던 시절이었다.]와 교역상 이득을 동시에 노린것인데, 당연히 마찰이 없던것은 아니라서 수도권인 말레는 순조로운 개종이 이루어졌지마, 지방에서 아직 불교를 믿던 세력들이 강했는데, 지방세력들에게 이슬람을 포교하는 과정에서 승려를 처형시키는 등 법난이 있던것으로 보이며, 지방세력들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슬람화가 되었다. 일부 고전 무슬림 학자들은 불교도를 넓은 의미에서 성서의 백성(Ahl al-Kitab)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 '성서의 백성' 개념은 본래 기독교도나 유대교도를 주로 지칭했지만, 지역에 따라 그 지칭 범위가 확대되어 [[조로아스터교]]도, 힌두교도, [[유교]]도, 불교도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는 이슬람이 교세를 확장하고 현지인과 융화되어 가는 과정 중 일부이기도 했다. 단, 조로아스터교는 무슬림 초창기의 아랍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음이 분명하나, 힌두교, 유교, 불교는 그보다 불분명하기 때문에 의견을 달리하는 학자들도 많다. 이슬람에는 무함마드 이전의 여러 예언자 중에서 두 알키플(Dhu al-Kifl)을 언급한다. 두 알키플은 대체로 [[에제키엘]]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해석이 있으며, [[여호수아]], [[오바디야]], [[욥기|욥]], 심지어 [[붓다]]까지 후보군에 포함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키플(Kifl)'을 석가모니의 출신지인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의 와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두 알키플을 붓다로 해석할 경우, 불교 경전 역시 예언자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 되므로, 불교도 역시 '성서의 백성'이 될 자격을 충족한다고 해석할 여지가 생긴다. [[태국]]에서는 태국 남부에 [[이슬람]]을 믿는 지역에 불교도를 이주시키고 [[승병]]이 조직되는 일도 있었다. 현재는 충돌이 많이 약해졌지만, 불교급진파가 늘면서 [[힌두교]] 말고도 소수 [[이슬람]]이나 [[기독교]]에 대해서도 굉장한 거부감을 보이고, 교회나 마스지드를 불교성지에 지었기에 불교도 시위대가 가서 없애버릴 것을 요구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또한 소수 [[이슬람]]과 갈등으로 [[절(불교)|절]]이 [[이슬람]] 급진파 공격을 받자 [[승병|승려들이 무장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다만 [[태국]] 문서나 [[스리랑카]] 문서를 참고하면 좀 복잡한 면이 있다. 스리랑카의 경우 [[싱할라족]] 불교 근본주의 단체인 부두발라세나의 영향이 크다. 스리랑카 내에 반이슬람 여론을 강력히 이끌어가고 있으며, 종교의 영역뿐만 아니라 수틀리면 정치의 영역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천명하고 있으며,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7&artid=201306171658141&pt=nv|미얀마의 극단주의 불교세력인 969과도 협력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8112205215&code=970207|이 기사]]를 참조할 것. 불교가 [[중앙아시아]]에서 크게 번성한 적이 있었지만 [[이슬람]], [[기독교]], [[조로아스터교]]와는 상당히 악연으로서 이들의 '''우상파괴 논리에 의해 수많은 미술품이 파괴되고 박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들이 바미안 석불을 파괴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이와는 반대로 [[동남아]]의 [[미얀마]] 등지에서는 불교도들이 [[무슬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혹은 [[모스크]]를 불태우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 현재의 [[중앙아시아]]의 종교는 [[http://www.joysf.com/club_military/4751116|이슬람이 대다수이다.]] 중앙아시아와 인도 불교가 이슬람의 공세로 쇠퇴하던 시기 이후에도 티베트 불교는 직접 이슬람과 대치하던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8세기 당시 신장 지역 서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은 무슬림들이 정복하여 급속한 이슬람화가 진행되었으나, [[토하리스탄]]의 경우 [[토번 제국]]이 무슬림들의 진공을 저지하였고 이로 인해 [[위구르]]인들이 완전히 이슬람화하는 시점은 14~15세기로 늦춰졌다. 역사적으로는 [[인도]]와 [[아라비아 반도]]는 매우 가깝고, 중앙아시아 불자들이 인근 페르시아로 가서 불교를 성공적으로 전파하여 페르시아 만 일대에는 많은 불교 사원 유적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서기 3세기 경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불교를 탄압하고 기독교 교세가 늘어난데다 결정적으로 이슬람 세력이 중동을 장악하면서 중동 불교는 씨가 마르게 된다.[* [[몽골 제국]] 시대에 몽골인들이 불교 사원을 다시 몇 개 건설하긴 했지만 중동의 몽골인들이 이슬람으로 금새 개종해버리는 바람에 현지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여담으로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부터 중동-이슬람권 경제 진출이 활발할 때 파견간 노동자들의 경우 불교 '신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불교 신자들을 선발해서 일부러 파견을 갔다는 뜻은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무신론자/무종교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노동자들도 형식상으로나마 종교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의 다른 메이저 종교인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등)는 이슬람교와의 충돌이 매우 우려되기 때문에 서류상 종교를 대부분 불교로 통일시켰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